가지런한 마음

불렛저널Bullet Journal 이야기(2023년 셋업과 함께)

아른이arnee 2023. 1. 20. 04:04

일기 블로그에 있던 것을 조금 다듬어 왔다.


 

들어가며:

내가 처음 불렛저널을 접한 건 2015년 경이었다. 당시 한국 자료가 거의 없어서 서구권 블로그를 탐색하며 최대한 나에게 맞는 방식을 찾고자 고군분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불렛저널에 푹 빠진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지만 그중 가장 매력적으로 느꼈던 점은 ‘공백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부분이었다. 당시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자기 기준이 높고 성공과 실패의 간극이 극단적인 편이었는데, 매년 하반기로 접어들면 플래너나 일기의 빈 페이지를 보며 울적해하곤 했었다. 불렛저널이라면 공백이 생길까 걱정하지 않아도 ‘언제든 이어 적을 수 있기 때문에’ 자유로웠다.

1.

첫 불렛저널(2016)


2015년에 불렛저널을 접하고도 당시 쓰던 플래너를 마저 쓰느라 당장 불렛저널을 시도해볼 엄두를 못 냈다. 그러다가 처음 불렛저널을 시도한 건 일본 취업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취업 설명회와 면접 일정 관리, 면접이나 스터디를 하며 피드백을 좀 더 효율적으로 기록하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는데, 아직도 이 노트를 보면 그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샘솟는다.

연간 페이지

연간 페이지에는 월별 채용 이벤트나 면접/교육 일정, 개인적인 기념일(가족, 친구 생일)을 주로 적었다.

먼슬리 페이지 

먼슬리에는 그 달의 주요 일정을 적었다. 이 때는 최대한 필요한 정보만 적으려고 노력했다. 내용이 많으면 한 눈에 안 들어와서 피로함을 쉽게 느꼈기 때문이다. 취업 관련 세미나 중 우수 수강생 일부를 선발해 교육하는 커리큘럼이 있었는데 이 때 선발을 축하하며 친구가 붙여준 부적(ㅋㅋㅋㅋ)이 눈에 띈다.

면접 리뷰 페이지, 면접 일정 페이지

면접 페이지는 면접 보고 나온 직후에 작성한 것인데 면접관이 궁금해한 부분이나 좋은 평가를 받았던 부분, 아쉬웠던 부분과 개선하고 싶은 방향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마냥 취준 기록만 한 것은 아니고, 만년필 잉크를 테스트하거나 친구의 아무말 낙서 같은 걸 붙여놓는 낙서 구역도 만들었었다. 머리에 힘 빡 주는 시기이다보니 느슨하게 히히 웃는 순간도 필요했다.

 

지금 보니 새롭다고 느끼는 지점은 먼슬리 바로 다음 위클리가 와야 한다는 강박관념 없이 자유롭게 쓴 부분이다. 중요한 일정을 옆 페이지에 바로 받아적고 뒤쪽에 위클리를 적었다. 면접 페이지도 그 면접을 본 날에 바로 펼친 페이지에다가 줄줄 이어서 썼다. 사실 이 자유도가 불렛저널의 가장 큰 이점인데. 내가 갈수록 불렛저널의 형식에 얽매이는 건 아닌가 하는 반성을 좀 해봤다.

취직 직후 데일리 페이지

데일리 페이지는 주로 투두리스트와 메모로 구성했다. 처음에 체크박스를 큼지막하게 그려 썼다가, 노트의 작은 모눈과의 괴리가 영 못생겨서(?) 형광펜으로 긋는 방식을 택했던 기억이 난다.

이 때부터 직장인으로서의 일상 카테고리를 하나씩 나누기 시작한 흔적이 보인다. 일본 행정 / 회사 업무 / 자기계발 / 일상생활 / 취미 다섯 가지로 나누었다. 지금의 나라면 건강 카테고리를 하나 더 넣겠지만 저 땐 저게 최선이었네.

번외 1.

업무노트

인데 이제 불렛저널 요소를 곁들인


마악 불렛저널의 일상 구조화 효과를 보고 있다가 취직하니 이전의 연장선 느낌으로 업무노트도 불렛저널 형식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전 내 일상을 기준으로 했던 작성법은 도저히 업무에 들어맞지 않아서(당연함…) 우왕좌왕 좌절했고, 그 시기의 업무 노트는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어 기억에서 지웠다.

지금 생각하자면 신입사원으로서 인풋해야 할 회사의 전반적인 사업내용과 실무선에서의 일정, 그리고 루틴업무의 구체적인 매뉴얼을 모두 다 한 곳에 완벽히 줄세우려다 보니 발생한 문제 같았다. 퇴사하기 직전에도 다 알고 있는 상태가 전혀 아니었는데 이제 막 들어간 신입이 업무 내용과 목적을 처음부터 완전히 정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저 연수받는 내내 순서대로 적어놓고 펄럭펄럭 찾아보기의 일상이었을 뿐…

 

전후맥락을 전부 메모하느라 투두리스트 + 메모 형식을 벗어나지 못하던 사회초년생…
맥락 없이도 이해할 수 있게 되어 투두리스트로만 적기 시작함
조금 여유가 생겨 투두리스트에 완료시점을 적으며 일정의 진척 여부를 확인하기 시작함​

어느 정도 연차가 쌓이자 루틴업무도 몸에 익었고 지금 해야 하는 일이 회사의 사업 중 어떤 파트의 일인지를 정확하게 인식하게 됐다. 그러자 우선순위나 납기/기한을 정하는 일이 조금 더 수월해졌고 그 때부터는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언제까지 하느냐’를 관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됐다. 이는 업무 일지에서도 바로 보이는데…

불렛저널로 적던 위클리 형식을 가져와 외부 미팅이나 마감처리, 휴가 일정 등을 한눈에 볼 수 있게 적어놓은 점이 달라졌다! 이전에는 했는지 안 했는지를 주로 확인했다면 이 시기에는 계획대로 되었는지, 연기되었는지, 언제 완수했는지를 중심으로 효율성을 따지게 된 것이었다.

먼슬리는 탁상형 달력을 썼기 때문에 업무 노트는 주로 위클리+데일리의 반복으로 적혀있다.

한 영역을 지정해 필요한 정보를 모아 기록하거나, 한숨 돌리거나 마음 놓을 수 있는 쪽지를 붙여두는 건 이전 불렛저널을 쓰며 익힌 감각인 것 같다. 초록 포스트잇은 전회사 타 부서 동료가 샘플 넉넉하게 챙겼으니 마음대로 써도 된다고 덧붙여준 호의가 고마워서 붙여두었다.

 

2.

다시 일상 불렛저널로(2019)


위 업무노트에서 열심히 일한 것이 티나지 않는가? 티 나야 한다. 왜냐면 번아웃이 세게 온 시기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기록이라고는 한 톨도 못 했다. ^_^ㅎㅎㅎㅎㅎㅎ 막연히 불렛저널 서식을 떠올리며 업무 일지를 쓰면서도 정작 내 일상을 돌보는 데엔 실패하다니… 날마다 하루살이처럼 버텼던 것 같다.

그러다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이불을 박차고 일어난 시기가 왔고, 내 인생에 가장 정돈된 일상을 함께 보내던 불렛저널을 떠올렸다. 그 사이에 한국에도 일본에도 다꾸 붐이 일고, 불렛저널도 소개되고, 불렛저널의 창시자(?)가 엮은 책도 번역되어 출간될 정도로 정보가 많아졌으니 다시 한 번 써봄직하다 느꼈다. 일에 치여 꼬깃꼬깃 구겨진 직장인의 일상을 빳빳이 펴보리라 다짐하며 새 불렛저널에 도전했다. 마침 절친한 친구에게 생일선물로 받은 올리브색 로이텀이 불렛저널에 딱 제격이었다.

셋업 페이지

가장 먼저 한 일은 맨 뒷 페이지를 펼쳐 그리드 시트를 작성한 것이다. 먼슬리든 위클리든 구역을 나누어야 한 눈에 들어오니 원활한 셋업을 위해 해두는 게 좋다는 얘기를 들었다(아마도 외국 셋업 유튜브를 봤을 것이다) 로이텀의 좋은 점은 마냥 모눈이 아니라 페이지 수가 기록되어있다는 것… 맨 앞장의 목차에 차곡차곡 페이지수를 기록하는 것도 내 일상을 책으로 엮는 듯해 짜릿하다.

그리드 시트 옆에는 분기별/월별/주별/일별 목표나 점검일을 적어뒀다. 자주 펼쳐볼 페이지에 자주 눈에 들어오면 그만큼 더 목표를 의식하고 꾸준히 기록하게 되는 효과가 생길 것이라 믿었다.

돌이켜보는 지금, 위 판단은 대단히 효과가 있었다고 장담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이 때만큼 꾸준히 불렛저널을 썼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당시 내가 무엇에 집중해 결과적으로 어떻게 불렛저널을 구상했었는지 기억나는 대로 최대한 자세히 적어내려가기로 했다. 그럼 다시 시작하는 2023 불렛저널에도 도움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선 큰 흐름은 연간 목표 - 먼슬리 - 해빗트래커/가계부 - 위클리 - 데일리 - 한달 총평 - (먼슬리 이후 반)인데, 이 사이사이에 읽고 있는 책 리스트나 아이디어 페이지를 끼워넣었다.

먼슬리와 월별 구체적 목표/일정

앞서 적었던 분기별/월별 목표를 곧바로 활용할 때가 왔다. 먼슬리에서는 이전 단계에서 세워둔 목표 목록을 하나하나 살피며 먼슬리 페이지 공백에 주루룩 적어내려갔다. 추상적인 목표는 이 단계에서 구체화했다.

ex)

월별 목표: ‘월별 수입/지출 점검’

-> 언제 실행할지를 결정, 그 날짜에 기입 (차일피일 미룰 가능성을 낮추는 효과가 있음)

월별 목표: ‘꾸준히 달리기’

-> 월 nn회, 주 n회 (쪼개서 실현 가능한 빈도를 파악할 수 있음)

 

해빗 트래커와 가계부 페이지
 
 

해빗 트래커에는 들이고 싶었던 습관을 적고 한 달이 끝날 무렵에는 달성률을 계산했다. 처음에는 매일 할 것으로 시작했다가 (당연히) 실패해서 그 뒤로는 n/31이 아니라 앞서 먼슬리에서 세웠던 월 횟수를 분모 삼아 계산하게 됐다.

가계부는 손으로 지출 내역을 적으면 귀찮아서 소비가 줄어든다는 얘기에 혹해 도입했는데 정말로 귀찮아서 장 보고 온 날은 안 적게 되더라. 수기 가계부는 오래 지속하진 못했고 대신 전자 가계부를 꾸준히 썼다.

위클리와 데일리 페이지
 

꾸준히 쓸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위클리와 데일리 페이지였다. 먼슬리에서 주별 빈도나 횟수 면에서 목표를 세웠으니 이 단계에서는 어느 요일에 뭘 할지 할당하는 것으로 시작하면 된다. 다른 일정이 있으면 이 때 조절하고 목표를 다시 잡을 수 있어서 아무 생각 없이(머리를 사용하지 않고) 해낼 수 있었다.

데일리는 더 간단하다. 이미 쪼개질 대로 쪼개진 주별 목표를 보고 실행 여부만 적으면 된다. 나는 생활 습관 다잡기에 몰입해있던 때여서 수면시간이나 식사 여부, 가사 여부를 같이 기록했었다.

또 한 주의 마무리에는 그 주의 총평을 적곤 했는데 잘 한 점이나 아쉬웠던 점, 그럼에도 의미 있었던 점을 주로 꼽아 나 스스로의 자신감을 북돋아주려고 노력했다.

내가 핵심으로 꼽는 건 먼슬리 리뷰다. 주별 리뷰는 단기적이라 개선 흐름이 보이지 않는데 먼슬리 목표로 세웠던 것을 수치화해보면 뿌듯함도 생기고 가시적으로 달성여부를 확인할 수 있어 동기부여가 된다. 관심사나 재밌었던 책, 영화, 인상깊었던 노래 같은 걸 적어두면 나중에 나만의 어워드를 할 수 있다^_^

이렇게 성공적으로 보이던 불렛저널이 뜸해진 계기는 점점 ‘잘 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진 순간이었다. 월별 페이지도 휘황찬란했으면 좋겠고, 좀 더 조직화된 아이디어가 생각났으면 좋겠고, 달성도도 착착 올라갔으면 좋겠어서. 부담 없이 쓸 거라고 인지부조화를 견디며 월별 한줄일기로 근근이 연명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완전히 손을 놓게 되었다. 이 경험으로 이제 ‘예쁘게 잘 쓴 불렛저널’을 바라는 마음이 훅 꺾였다.

번외 2.

디지털 플래너


아이패드를 구매하면서 디지털 플래너를 요긴하게 쓰리라 마음먹었던 때가 있었다…

 

다시 디지털 플래너 쓰라 하면 못 쓸 것은 없는데… 솔직히 종이 플래너보다 마음의 허들이 높다… 아이패드를 열자마자 많은 유혹(OTT, SNS)을 벗어던지고 플래너를 켜야 한다는 게 나에게는 큰 어려움이었다. 아무 때나 적고 싶지 아이패드에 애플펜슬에 배터리 챙겨가며 하기가 귀찮았다.

장점: 모든 것을 다 다꾸템으로 쓸 수 있음 / 자유도가 무궁무진함

단점: 자유도가 많은 만큼 본말전도 될 가능성이 높음(다꾸하느라 기록을 못 한다거나…)

취향만 그러모아 먼슬리 서식 만든다고 +도트 제작 페이지에서 간격과 색상 맞춰 PDF로 출력해서 굿노트에 불러와 먼슬리 그리드 그려놓고 접히는 연출 하려고 그림자까지 넣어가며 생고생을 해봤지만 결국 지금은 안 쓴다~~~~~

모름지기 인간의 뇌를 활성화하려면 손으로 쓰는 게 짱이라 했다.

3.

플래너(2022)


그럼 최근에는 어떻게 쓰고 있었냐? 시중에서 파는 먼슬리+위클리 플래너와 1시간 플래너를 같이 쓰고 있다… 근데 먼슬리만 썼지 위클리를 꾸준히 쓴지는 얼마 안 됐다(봄에 시도했다가 위클리 싸그리 망해 빈 칸만 남고 11월부터 부랴부랴 기록 재개함)

 
 

길고 긴 권태기 속에서도 자산처럼 남은 이전 기록들의 경험은 언제든 재개할 수 있는 힘을 줬다. 먼슬리 리뷰의 중요성을 알게 된 나는 이제 위클리 리뷰도 데일리 리뷰도 꼬박꼬박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됐다.

사실 퇴사/귀국 이후로 줄줄 새는 시간 부랴부랴 잡아보려던 건데 생각보다 너무 쉽게(?) 지속하는 중이라 얼떨떨하다. 해야만 한다 염불 외면서 괴로워하지 말고 그냥 흐르듯 적으면 되는 거였는데 또 잘 하고 싶은 마음이 앞섰었나보다. 절대 글씨 예쁘게 안 쓸 거야. 아름답게 꾸미지 않을 거야. 제발 오래 가자…

한 가지 더, 플래너든 일상 기록이든 그 자체를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 하면 훨씬 지속이 쉽다는 걸 발견했다. 나도 내 기록 보여주고 친구들 기록 보여달라 떼 쓰면서 아이디어를 얻어가는 기쁨을 맛봤다. 쓰는 게 당연한 일상이라니 퍽 신기하게 느껴진다.

4.

일상 불렛저널(2023)


여기까지 참 길고 길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불렛저널을 쓸 것인가! 목적에 맞춰 구성하되, 지속할 수 있는 정도를 파악하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내 2023 불렛저널 컨셉은

휴대성을 극대화해서
어디서나 무엇이든지 적는
못생기고 편한 저널

로 정했음.

 
남아도는 플래너 위클리 페이지를 메모로 마음껏 활용하는 중

우선 선호하는 사이즈와 눈금/모눈/줄 옵션을 가늠해보고 필요한 기록 종류를 정리했다. 로이텀 A6사이즈는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흐릿한 도트 구성으로 내 심미안을 만족시키는 노트였다.

나는 세 종류의 기록이 필요했다. 1) 앞으로의 일정을 관리하고 해낸 일정을 정리하는 사후 플래너 2) 들이고 싶은 습관을 트래킹할 해빗 트래커~먼슬리 기반~, 3) 줄글일기와 떠오르는 생각을 적을 저널

거기에다가 애플워치 앱으로도 간단히 확인하는 정도로는 연동이 되었으면 해서 각각 매치할 앱이나 기능을 연결지었다. 1) 은 애플/구글 캘린더로 기록하기, 2) 는 미리알림 목록으로 나눠놓고 애플워치로 그때그때 체크할 수 있게 하기 3) 은 원래 손글씨로만 적는 내용이고 줄글 노트를 쓰던 게 있어서 그걸 마저 활용하려고 한다.

불렛저널에는 월별 해빗 트래커 + 위클리 리뷰 + 데일리 리뷰 + 취미 페이지로 꾸려갈 생각이다. 이전에는 취미 즐겁다~ 로 끝냈다면, 올해에는 성취도를 구체적인 항목으로 정리해볼까.

 

 

이제 전보다 버벅대지 않고 냅다 불렛저널 쓸 수 있겠다. 하지만 늘 계획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충분히 아는 30대이므로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 불렛저널 구경하다가 좋은 거 있으면 내 걸로 변형해 써야지. 좋아 보이는 건 다 내거다.

세대교체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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